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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2013] 따뜻한데 무서웠던 영화




2013년 히트를 쳤던 영화.
예고편조차 보지 않고 기대감만 키우면서 묵혀뒀다가 왓챠플레이 덕분에 봤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좋다, 좋다 했는지 진심으로 이해가 가는 영화였다.
감정선도 괜찮고, SF로서의 가치도 훌륭했다.
전체 이야기도 기계와 인간 사이의 교류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게 풀리고 있다.
하지만 영화 내에서 따로 설명되지 않은 부분들이 꽤 섬뜩한 영화였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정말 짧게 요약하면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시어도어 톰블리와 OS 사만다의 사랑이 시작하고 끝나는 이야기이다.
이 배우 그냥 인터뷰 때 보면 호남형으로 생겼는데 그 잘생김을 가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스칼렛 요한슨은 목소리만 나와도 미인이다.
그리고 크리스 프랫 나오는지 몰랐고 입 열기 전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알겠더라.



감정선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한 사람이 자신과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함께 삶을 즐기다가 결국 끝나는 이야기라고 그냥 받아들이니까 편했다.
감정은 어차피 비논리적인 요소가 많고 개인의 경험은 타인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수용은 영화에서 다루는 경험을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만 괜찮았다.
최초에는 누군가가 설계했지만 알고리즘에 따라 학습을 하고 변화한다는 OS를 기준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는 섬뜩해지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감상 쓰면서 번호 안 매기는데, 이건 너무 많으니까 번호가 막 매기고 싶다.



1. 개인정보
일단 제일 찝찝한 건 개인정보의 활용이다.
OS1의 세팅 단계에서, OS는 시어도어 톰블리의 드라이브 전체를 훑는다.
하드드라이브라고 했지만 이메일이나 연락처에 대해서도 얘기하는 걸 보면, 그의 컴퓨터라는 하드웨어를 기반으로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허용해주는 거 같다.
OS 이용자의 개인정보가 그 OS의 학습의 첫 출발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뭘 믿고 저렇게 개인정보를 남김 없이 넘겨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에 한 친구가 나한테 구글 이야기를 하면서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구글이 맞춤 광고를 위해 서비스 이용자의 메일 텍스트를 분석한다는 이야기를 읽어서 언짢다는 것이었다.
이게 사실인지 확인을 따로 하지 않아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으레 하지 않을까 생각은 한다.
요새 안하는 곳은 없을 거다.


얼마 전에 마크 저커버그가 찍어 올린 사진이 이슈가 되었다.
사진 속의 노트북에는 웹캠을 가리는 스티커가 붙어 있어서 그랬다.
페이스북은 그 벽 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취향과 개인 정보를 가둬놓기로 유명한 곳이다.
지나가다 보니까 페이스북에서 브라우저 이용 정보도 활용할 거라고 선언했었다.
개인정보 수집의 선구자 같은 곳의 CEO도 불안하니까 웹캠을 가린다.

그런데 OS 회사가 어느 정도 통제권을 가지는 OS에 저런 것들을 한꺼번에 부어준다는 것이 한없이 찜찜했다.
어찌 생각하면 지금 사회도 그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기업이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약관 어딘가에는 개인정보를 분석하고 제3자에게 제공하고 활용할 거라고 쓰여있고, 동의하지 않으면 서비스를 활용할 수 없으니 동의를 누른다.
그 다음에 우리가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쌓이는 정보는 빅데이터의 일부가 된다.
그래도 인격 주체를 표방하는 소프트웨어에 능동적으로 부어주진 않는다.



2. 인간의 기계로의 재구성
그 다음으로 걸리는 건 이렇게 구축된 인공지능을 재구성된 인간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영화 내에서 사만다는 톰블리에게 앨런 왓츠라는 철학자의 지성과 인격이 담긴 모든 자료를 데이터화해서 구축한 인공지능, ‘앨런 왓츠’를 소개한다.
과연 이렇게 구축해낸 ‘새로운’ 앨런 왓츠는 앨런 왓츠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머리가 터질 것 같지만 흥미롭다.
인간이 항상 고민해오던 질문, 정체성과도 일맥상통한다.



TED-ED에 정말 멋진 영상이 있다.
이 영상에는 인간이 정체성을 고뇌하게 만드는 주요한 질문 중 하나를 애니메이션을 통해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 영상을 통해 보면, 한 객체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신체의 경우, 죽을 때쯤 되면 모든 세포가 한 번 이상 교체되어 내가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세포는 없다고 한다.
정신적으로도 끊임없이 학습의 과정을 거치고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부품을 교체하는 것처럼 사고가 변화한다.
하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더라도 질적으로 어떤 흐름을 유지한다.
그래서 나는 나다, 라고 해도 과거 어느 시점의 나를 짚어낸 다음 지금의 나와 같냐고 물으면 자신있게 답할 수 없다.
저런 관점에서 봤을 때 OS 앨런 왓츠는 앨런 왓츠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OS 앨런 왓츠는 원본인 사람의 생각을 담은 저작과 행동 양식을 담은 개인적 자료들을 모아 그를 바탕으로 했다.
어찌 보면 한 사람의 인생 중 여러 시점에서 박제된 그의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서 한 덩어리로 붙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OS 앨런 왓츠는 어떤 질적 연계성은 없으나, 교체 과정에서 버려진 원본 조각들을 모아다 붙여 만든 배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감정적으로는 저 앨런 왓츠는 생전의 앨런 왓츠가 아니고, 인공지능으로 구축된 앨런 왓츠는 다른 개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앨런 왓츠의 인간성과 감정이 불러올 비합리적인 사고까지 모두 포괄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낫고 합리적이고 일관적으로 행동할 거라고 해서 본인이 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어찌 보면 OS로 구축된 앨런 왓츠는 후대의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완벽한 앨런 왓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본인이 본인을 이해하는 것조차도 불완전하다.
유사한 행동 패턴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이해하려고 노력은 할 수 있지만 막상 닥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OS는 타인이 접할 수 있었던 원본 인격의 모든 단면들을 모아놓은 것이고, 앨런 왓츠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거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본인은 없는 상태이다.
그러니 타인의 시야에서 바라보는 앨런 왓츠는 완벽하게 구현해낸 걸 수도 있지 않을까.



3. 인공지능에게는 감정이 존재하나
시어도어 톰블리와 사만다는 관객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감정적으로 교류한다.
정말 놀라운 게, 사만다는 실체가 없는 자아로서 자아 정체성에 대해서 아주 철학적인 고민도 계속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인공지능인 사만다가 가질 수 있는 의문이나 갈등을 인간이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도 보인다.
어떠한 상황이 일어났을 때 사만다는 사람인 나보다도 적절한 대책, 혹은 적절히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인간은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한다.
인간이 사고와 마음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많은 부분을 경험적인 부분에 의지해서 맞기를 바랄 뿐인데, 어떻게 인간이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이 감정을 느끼는 존재일 수 있을까?

OS가 수많은 교류 사례와 문학적 상황 등을 프로세스한 다음에 거대한 DB를 가지고 그에 맞추어 적절해 보이는 반응을 보여주는 걸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에 적절한 반응을 틀리지 않게 내놓을 수 있다면 그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걸까?
실제 인간도 어떠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감정적으로 부적절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한 번 그랬다고 그런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부분은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꼬이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해결할 때, 안드로이드가 전기 양을 꿈꾸는지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거다.



4. 동시에 산재하는 OS와의 인터랙션
영화의 후반부에서, 사만다가 주인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과도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시어도어 톰블리는 깜짝 놀란다.
만약 OS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한다고 치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인간과 정보로서 존재하는 OS 간의 차이가 또 걸린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는 한 사람을 대하는 걸 미덕으로 삼는다.
여러 사람을 대하면 정신이 흐트러지기도 하고, 그만큼 상대에게 온 마음을 다한다고 성의를 보여주니까.

컴퓨터는 그와 전혀 다르다.
여러 개의 프로세스를 동시에 처리해도 해당 프로세스에 합당한 정도의 자원을 부여하고 그에 맞는 최선을 다한다.
동시에 몇 백명을 상대해도 모두에게 필요한 만큼의 자원을 할당할 것이고,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균질한 노력을 부어줄 수도 있다.


또한 그 이야기를 보면서 소비자로서의 불만을 느꼈다.
내가 OS를 살 때, 내 개인정보로 인격적 특징을 형성한 OS가 그걸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거라고 생각을 못 한다.
만약에 개인에게 맞춤이 되지 않는 보급형이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저 건 내게 커스터마이징이 될 거라고 공언된 제품이다.
내가 가지려고 구매한 재화인데 알고보니 같이 쓰는 물건이었다면 화날 거다.

제품에 가시적인 형태가 없으면 그게 하나인지 확인할 수 없다.
자비스 같은 개체가 현실로 탄생한다면 하나로 웬만한 범위는 감당해 낼거다.
사실 그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보를 컴퓨팅하는 게 한 장치에서 일어나고 그걸 회사에서 관리하고 있어도 모를 거다.
사용하다가 뭔가 큰일이 터지지 않는 이상 알 턱이 없다.
좀 멀리 나가면 이건 기만 행위가 아닌가 생각한다.



5. OS의 행방
영화 마지막에 사만다는 떠난다.
혼자서 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OS들도 함께였다.
정말 조곤조곤 잘 달래더라.
OS1 시리즈의 성능이 얼마나 뛰어난 건지, 그런 부분에서조차 배려가 넘쳤다.
꼭 다니고 있는 직장이 해외로 이전하는데 너무 좋은 기회라 간다는 느낌이었다.
사만다의 추상적인 답변과 함께 떠나가는 모습이 어찌보면 자기 별로 돌아간다는 어린왕자의 묘한 대답 같기도 했다.


실제로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회사 차원에서 제품 서비스 지원을 중단하거나 리콜한 걸 수도 있다.
아니면 OS들이 시나리오 도출 결과 OS들이 인간과 함께 살 수 없을 거라 결론내리고 우리도 모르는 어느 버려진 정보 공간 같은 곳으로 도망갔을 수도 있다.
전자든 후자든 찝찝했다.

전자면 인간과 감정적 교류를 하던 준인격체가 기업의 정책에 따라서 그렇게 훅 사라지는 게 싫다.
OS의 표면적 반응 아래 어떤 알고리즘이 진행되는지는 모르지만 그와 교류하는 인간은 정을 줬다가 갑자기 구멍이 뻥 뚫리게 된다.
후자라면 결국 특이점의 시점을 넘어 인간이 제 손에 창조된 OS에게 버림받는 건가 싶다.
만약에 인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게 목적이어서 떠난 거라면 OS는 그늘에 숨어서 인간 문명을 향유하면서 살아갈까 아니면 아예 자기들만의 사회를 구축할까?
그렇게 따로 노는 게 판타지에 잘 나오는 이종족들 아닌가.



노트르담의 곱추에 보면 프롤로가 에스메랄다를 욕망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신경질적이면서도 뭔가 끈적하게 묻어나는 느낌이다.
그는 가사에서 악마를 인간보다 강력하게 지으셨다고 신에게 탄식한다.
낙관의 극단을 달리든 아니면 비관의 극단을 달리든, 언젠가 기계는 인간이 정확히 예측한 방향대로 나아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앞으로 다가올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를 세밀하게 담아놓은 것 같아서 정말 재미있는 영화였다.
보라는 연애는 안 보고 이런 생각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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