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실연을 보고 왔다.
웬만하면 OST하고 유튜브로 버티는데, 한번 굴복하고 보러 가니까 알고 있던만큼 재미있고 알지 못한 부분들이 더해져서 색다른 데다가 금상첨화로 커튼콜 때 다같이 웃으면서 노래하는 모습까지 더하니 멋진 경험이었다.
본 공연도 감정을 쏟아붓는 모습이 전율이 일지만 커튼콜은 배우들이 배역을 벗고 관객 앞에 본인으로 서서 소통하는 순간이라서 극이라는 틀에서 살며시 나온 모습들이 좋았다.
그 모습을 내가 찍어온 사진 속에서 보다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일단은 과연 연기는 어디까지 이어졌을까, 라는 것이다.
사실 커튼콜은 상호적인 애정 공세의 장이고, 전체 공연에서 이 순간이 제일 자유로울 때라 생각한다.
보고 있으면 그 순간이 즐거우면서도 끝날 것을 알고 있으니 아쉬워서 어떻게든 흘러가는 순간을 붙잡고 싶다.
그 아쉬움에 여러 사람들이 그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찍고, 나도 사진을 찍었다.
2층에서 관람을 하면서 보는데, 아래쪽 앞은 무대의 강한 스포트라이트 바깥에도 스마트폰의 파르스름한 화면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더라.
나는 그 때 특히나 인상깊었던 배우들이 웃는 모습을 잡아보려고 허우적댔다.
그 뒤에 집으로 돌아와서 카메라의 사진을 다시 꺼내서 확인하는데, 배우가 하이파이브 하자고 팔을 내밀면서 걸어오는데 제일 앞줄에 서있는 사람들이 주연을 찍는 카메라에 집중하느라 다른 사람들에게 가는 모습이 잡혔더라.
그 사진을 보고는 반대편에서 볼 때는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하면서야 저 사람들이 웃으면서 커튼콜에서 유명한 넘버를 부르는 모습만 프레임 가득히 보이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시선은 LCD 화면을 향한 채 집중하고 있는 파랗게 빛나는 얼굴들과 번뜩이는 유리가 보일 텐데.
언젠가의 추억으로 꺼내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 순간을 프레임 속에 담아두길 선택하고 내밀어진 손을 바로 잡지 않으면 그 배우의 제스처는 화답받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허공으로 흩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프레임 속의 모습은 다른 시간대에 그것을 꺼내볼 이를 위한 박제가 된다.
요즘은 사진 기계가 워낙 많아서 이렇게 무언가를 보러 가서 촬영하는 모습이 흔하다.
피사체가 되는 배우들도 이런 세태에 대해서는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영상들을 보다보면 아예 렌즈에 눈을 맞추고 이런 저런 서비스컷을 연출해주는 사람들이 늘었다.
하지만 아무리 촬영자가 프레임 속의 눈길에 시선을 맞춘다 해도, 둘 사이는 센서가 가로막고 있고 화답을 받지 못하니 박제될 상을 위한 연기가 된다.
배우들은 메아리 없는 외침처럼 응답받을 가능성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걸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벽을 향해서 소통을 연기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또 하나는 경험과 기록 중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사진을 찍는 자체를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한 때에는 당연스레 카메라를 꺼내들지만, 체험 자체가 강조되는 경우에는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더 웃기는 건, 이 사진들은 반년 이내가 아니면 잘 꺼내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연히 찍었던 사진과 마주했을 때 그와 함께 떠오르는 단편적인 느낌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댄다.
사진 또한 정보다.
거기다가 선별한 사진을 글과 곁들여 정리하지 않으면, 그 사진들은 탈맥락적으로 존재하게 되어서 얼핏 보면 당최 이 사진을 왜 찍었는지 알 수가 없다.
옛날에는 사진은 현상해야 감상할 수 있는 것이어서 앨범에 골라서 꽂으면서 돌이켜보고 그 여백에 이런저런 말들을 남겼는데 요즘은 디지털로 인쇄하지 않고도 훑어볼 수 있으니 맥락화 작업이 생략된다.
그래서인지 내가 찍은 사진이어도 구성적으로는 왜 찍었는지 이해가 가지만 그 외에는 사람이라도 찍혀있는 게 아닌 이상 어느 곳에서 어떤 이유로 찍었는지 이해가 안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을 보면 제대로 정리조차 하지 않아서, 사라질 찰나를 잡는다는 순전한 만족감으로 사진을 찍어놓은 기분이다.
그럴 거면 그 순간에 더 몰입해서 즐기면 좋을 텐데,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촬영을 선택한다면 연기자들과 시선을 주고받거나 손을 잡아볼 경험을 기회비용으로 버리는 일이고, 그저 그 순간을 즐기기로 선택한다면 그 때를 돌이킬 때 불완전한 내 기억에만 의존해야 한다.
거기다가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다시 보면 기억할 수 있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방심하다보니 기억을 더 못하는 기분이다.
어떤 순간을 한 형태로 남길 수단이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고 오롯이 몰입할 수 있는 의지가 과연 내게는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스스로가 경험을 즐기는 과정의 일부로 사진을 찍는 건지 동물의 가죽을 벗겨서 박제하는 것처럼 장면을 틀에 박아 자랑하고 싶은 건지 하는 생각도 들고.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에 정말 멋진 장면이 있다.
영화 자체도 사진과 실제 경험에 대해서 다룬 터라 이 점에 대해 생각할 때 딱 떠올랐다.
영화 속 주인공인 편집자 월터는 사진작가 숀 오코넬을 찾아야하는데, 숀 오코넬은 여정 중에 설표를 찍으려고 커다란 등짐을 이고 설산을 올라간다.
월터는 그런 작가를 쫓아서 산을 오른다.
그는 숀 오코넬이 설표를 찍으려 자리잡았을 때 드디어 그를 따라잡는다.
그런데 이 사진작가는 막상 설표를 마주하자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그냥 그 동물의 모습을 음미한다.
그 순간을 즐기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 피사체 하나를 찍기 위해서 많은 시간, 노력과 예산을 투자해서 먼 곳까지 왔고 그가 찍을 사진 한 장, 한 장에 큰 돈이 걸려있지만 그 순간을 즐기겠다는 이유로 그냥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숀 오코넬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영화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드러내주는 장면이었다.
나는 언젠가 숀 오코넬처럼 그렇게 카메라를 놓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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